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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와 소비시장 재편이 농업의 판을 흔들고 있다.
과거에는 농부의 숙련된 기술이 수확량을 결정했지만, 이제는 기후 변화를 이겨내고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을 '유전적 잠재력'을 가진 품종을 확보했느냐가 성패를 가른다.
농촌진흥청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식량작물은 물론 원예·특작, 축산까지 아우르는 미래형 품종 육성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기후 적응성, 안정 수량성, 기능성, 가공 적합성, 소비자 선호, 지속가능성까지 모두 고려하는 품종 개발이 한국 농업의 다음 경쟁력을 만들고 있다.
품종은 오랫동안 농업의 출발점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출발점에 머물지 않는다. 생산, 유통, 가공, 소비, 수출, 나아가 식량안보와 탄소중립까지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기후변화로 재배환경이 불안정해지고, 소비시장은 더 세분화됐으며,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은 한층 치열해졌다. 결국 농업의 성패는 같은 기술을 써도 어떤 품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갈리기 시작했다. 농촌진흥청이 단순한 신품종 개발을 넘어 기후 대응형, 데이터 기반, 시장 연계형, 지속가능성 중심의 품종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촌진흥청은 1998년부터 지난해 12월까지 143작물 2,947품종을 품종보호 출원 신청했으며, 등록은 132작물 2,594품종으로 88%의 등록률을 기록했다. 식량작물은 18작물 997품종이 등록됐고, 채소는 19작물 236품종, 과수는 18작물 206품종, 화훼는 28작물 799품종이 등록됐다. 사료작물은 9작물 66품종, 특용작물은 40작물 290품종이 등록돼 있다.
이 수치는 품종 개발이 특정 작물의 개선에 그치지 않고, 식량·원예·축산을 포괄하는 농업 전반의 경쟁력 구축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품종 경쟁력은 생산성과 품질을 넘어 기후 대응, 기능성, 가공 적합성, 시장 차별화까지 함께 좌우하는 핵심 자산으로 작동할 전망이다.
기후변화는 농업 현장에서 품종의 한계를 가장 먼저 드러낸다. 여름철 고온이 길어지고, 집중호우와 태풍이 반복되며 병해충 발생 양상도 달라지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품종은 단순히 잘 자라는 품종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기후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품종이어야 한다.
벼 품종 ‘안평’은 이러한 기후 대응형 품종 전략을 잘 보여준다. 2018년 육성된 ‘안평’은 밥맛이 우수한 고품질 벼이면서도 쓰러짐과 각종 병해에 강해 재배 안정성이 뛰어나다. 경북 경주에서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시험재배한 결과, 태풍과 장마에도 쓰러짐이 없었고 키다리병, 도열병, 흰잎마름병, 줄무늬잎마름병에도 강한 모습을 보였다.
수량도 10a당 537kg으로 비교 품종 ‘삼광’보다 5% 많았다. 기후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이런 내재해·내병성 품종의 가치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알찬미’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있다. 2018년 경기도 이천시와 농협 미곡종합처리장이 함께 참여한 수요자 참여형 품종 개발연구로 외래벼를 대체하기 위해 육성한 품종으로, 밥맛과 외관이 우수할 뿐 아니라 태풍에도 잘 쓰러지지 않고 도열병, 흰잎마름병, 줄무늬잎마름병에 강하다. 쌀 수량은 10a당 538kg으로 비교 품종 ‘화성’보다 6% 많고, 도정 특성도 뛰어나다.
최근 주목받는 ‘미소진품’은 기후 대응력을 가장 뚜렷하게 입증한 사례다. 벼가 익을 무렵의 이상 고온이나 긴 가을 장마에도 쌀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 뛰어난 재배 안정성을 갖췄다. 덕분에 경북 상주시에서 기존 품종 ‘일품’을 대체하며 지역 대표 쌀 브랜드 ‘밥상주인’의 원료곡으로 안착했다. 재배 면적은 2021년 20ha에서 2024년 1,600ha로 불과 3년 만에 80배 넘게 확대됐다.
품종 개발은 더 이상 감에 의존할 수 없다. 원하는 형질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구현하려면 데이터 기반 정밀육종 체계가 필수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이 운영하는 ‘국산밀재배품질관리지원단’은 그 상징적인 사례다.
국산밀재배품질관리지원단은 전국 밀 생산단지의 기후, 토양, 재배 여건, 수량, 품질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생산단지별 맞춤형 재배품질관리 기술을 환류하는 체계를 갖췄다. DB플랫폼반은 데이터를 수집·관리하고, 기술지원반은 맞춤형 재배안내서 발간과 현장 교육을 맡으며, 기술개발반은 빅데이터와 AI 기반의 최적 재배관리 모델을 개발한다.
기존의 국산 밀 연구가 다수확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고품질 생산과 품질 균일성 확보를 목표로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체계로 전환하고 있다. 나아가 이 지원단은 현재 1% 내외인 밀 자급률을 끌어올리는 정책 목표를 기술적인 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정밀육종의 힘은 수확 이전부터 이후까지 전 과정에 걸쳐 발휘된다. 수매 단계에서는 근적외선분광분석기(NIR)를 이용해 단백질을 신속하고 비파괴적으로 분석하는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품종 판별용 DNA 마커도 개발해 품종 순도 관리와 이력 관리에 활용하고 있다. 생산부터 저장, 유통까지 데이터가 이어져야 품종의 장점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품종 개발에 대한 고민은 밭에서 끝나지 않는다.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품종 개발의 방향을 바꾸기 때문이다. 건강 기능성, 저당, 고단백, 프리미엄 과일, 간편 섭취, 지역 브랜드, 수출 적합성 같은 키워드는 이제 품종 개발의 핵심이 됐다.
식량작물 분야에서는 기능성 강화가 뚜렷하다. 밀 자급률 향상 전략에는 면용·빵용 용도별 품종 개발뿐 아니라 기능성 특화품종 개발도 포함돼 있다. 알레르기 저감 밀 ‘오프리’는 미국과 중국에 국제특허가 등록됐고, 국내에서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유색 밀 ‘아리흑’은 17개 업체에 기술 이전돼 통밀쌀과 통밀빵 등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재배면적도 계속 확대 중이다. 국산 밀의 경쟁력을 단순한 수량이 아니라 기능성과 차별성에서 찾겠다는 방향이 분명하다.
원예 분야에서는 소비자 취향을 더욱 직접적으로 반영했다. 사과 ‘만홍’은 380g 안팎의 큰 과실과 14.4브릭스의 당도, 아삭한 식감이 강점인 만생종이다. ‘골든볼’은 착색 걱정 없는 노란 사과로 단맛과 신맛의 조화가 좋다. 배 ‘설원’은 과육이 눈처럼 희고 갈변이 적어 먹기 좋고, 포도 ‘코코볼’은 껍질이 얇고 단단해 식감과 편의성을 함께 잡았다. 복숭아 ‘옐로드림’은 망고 맛이 나는 달콤한 천도로 껍질째 먹기 편하다. 2025년 대한민국우수품종상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상을 받았다. 딸기 ‘핑크캔디’는 향이 강하고 과즙이 풍부하며, 감귤 ‘윈터프린스’는 껍질이 잘 벗겨져 먹기 쉽다. 단감 ‘감풍’은 크기가 크고 식감이 아삭해 상품성이 높다.
축산 분야에서도 품종은 맛과 산업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제주 재래 흑돼지를 기반으로 20년간 유전·육종 연구를 거쳐 개발한 ‘난축맛돈’은 전 부위의 근내지방 함량이 높아 부위별 활용성을 극대화했다. ‘우리흑돈’ 역시 재래돼지와 듀록의 장점을 결합해 풍부한 육즙과 고소한 풍미를 확보하며 국산 종자의 경쟁력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우리맛닭’은 성장이 빠르고 콜라겐과 아미노산이 풍부해 맛과 효율을 모두 잡았다. 생활 승마용으로 개량 중인 ‘RDA 승용마’는 제주마의 강건한 체질에 더러브렛의 체형을 접목했다. 특히 승마 초보자도 쉽게 다룰 수 있도록 체고 145~150cm를 목표로 개량을 진행하고 있다. 이처럼 품종 개발은 이제 단순한 품질 향상을 넘어 소비자의 경험까지 정교하게 설계하는 방향으로 진화 중이다.
앞으로의 품종 전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탄소중립과 지속가능성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품종은 단지 재해를 견디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비료와 농약, 노동력을 덜 들이고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어야 진정한 미래형 품종이라 할 수 있다.
밀 분야에서 드론 생육영상을 활용한 변량시비 기술, 생육 단계별 물관리 모델, 늦뿌림 재배기술 개발이 강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적정 비료 사용과 정밀한 물관리는 품질 향상뿐 아니라 투입재 절감으로 이어진다. 품종이 이런 기술과 결합할 때 비로소 탄소중립형 생산체계가 가능해진다. 밀 중심 이모작 체계에 ‘선유2호’ 콩과 ‘해담쌀’ 같이 생육일수가 짧은 품종을 추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모작 확대는 토지 이용 효율을 높이고 국산 식량 기반을 넓히는 전략이자, 자원 효율을 높이는 지속가능한 생산 방식이기도 하다.
콩 품종 ‘소리흑’은 탄소중립형 품종이 지향하는 방향을 잘 보여준다. 쓰러짐과 탈립(알곡이 떨어져나가는 현상)에 강하고 내탈립성(탈립에 견디는 성질) 유전자를 보유해 기계수확이 가능하다. 기계수확은 곧 노동력과 생산비 절감으로 직결된다. 전국 8개 지역에서 3년간 지역적응시험을 거친 결과 평균 수량이 10a당 323kg으로 ‘소청자’보다 9% 많았고, 혼반용(잡곡밥용)은 물론 가공용으로도 활용할 수 있어 생산성과 재배 편의성, 가공 활용성을 함께 갖췄다.
‘미소진품’처럼 완전미 비율이 높고(96.1%) 도정 손실이 적은 품종은 수확 이후의 낭비까지 줄인다. 단감 ‘감풍’처럼 관리 노력이 적게 드는 품종, 거베라 ‘옐로우윙’처럼 꽃목 보강작업이 필요 없어 작업 공정을 단축해 주는 품종 역시 넓은 의미의 지속가능성 전략에 포함된다.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시장이 더 까다로워질수록,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품종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밥맛 좋은 쌀을 넘어 태풍에도 잘 버티는 벼, 수입밀과 경쟁할 수 있는 고품질 밀, 기능성과 가공성을 겸비한 잡곡, 소비자 취향을 정조준한 과일과 채소, 국산 종축 경쟁력을 높이는 축산 품종까지. 품종은 이제 생산 현장의 선택지가 아니라 농업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다.
농촌진흥청이 식량원·원예원·축산원 차원에서 추진하는 품종 연구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후 적응성, 데이터 기반 정밀육종, 시장 연계, 탄소중립이라는 네 가지 축은 앞으로 품종 개발이 나아갈 방향이자 한국 농업이 경쟁력을 지킬 방식이다. 씨앗 하나가 밥상과 시장, 산업과 지역, 그리고 국가 식량 전략까지 바꾸는 시대다. 품종은 더 이상 씨앗이 아니다. 농업의 미래를 설계하는 전략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