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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은수 농업연구사는 사과밭 사이를 뛰놀며 자랐다.
아버지와 마을 어른이 농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보며, 농업은 그에게 늘 가까운 삶의 일부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농업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대학에서는 원예학을 전공했다. 전공은 그의 적성과도 잘 맞았다.
사과밭을 누비던 소년은 이제 연구사가 되어 농업인의 소득을 높이고,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종자 강국으로 이끌기 위한 청사진을 그려가고 있다.
이은수 농업연구사는 어린 시절부터 식물을 유난히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는 꽃도감을 즐겨 보며 꽃의 학명을 외우곤 했고학교 화단의 나무 안내 팻말을 하나하나 읽는 일에서도 즐거움을 느꼈다. 책을 좋아했던 소년은 지금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채소기초기반과에서 근무하는 한편, 독서동아리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이번에 그가 추천한 『넥서스』 역시 동아리에서 함께 읽고 있는 책이다.
“사실 아직 완독하지는 못했습니다. 책이 꽤 어려워 절반 정도 읽은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었던 이유는 『넥서스』에서 이야기하는 ‘정보의 흐름’이 우리의 연구 방식과 많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보의 흐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설명한다. 중앙에서 정보를 독점하고 필요한 내용만 골라 전달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반론도 허용하며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도 있다. 전자는 초기에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정보 독점에서 오는 모순을 낳을 수 있고, 후자는 방향을 잡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고 널리 활용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든다.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요자와 충분히 논의해 정말 필요한 기술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개발 과정은 물론 개발 이후에도 수요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결점을 보완해나가야 현장에서 실제로 쓰이는 ‘살아있는 농업기술’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보를 공유하고 솔직하게 논의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연구가 현장에 실제로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지난 10여 년 동안 채소 대량 분자표지 세트를 개발하고 육종현장에 보급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 분자표지를 활용하면 작물을 일일이 심어보지 않아도 유전 정보를 분석하여 어린 모종 단계에서 원하는 개체를 선발할 수 있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총 23쌍의 염색체를 물려받습니다. 염색체에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물학적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유전자는 DNA의 특정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DNA는 이중나선 구조를 이루고 염색체에 배열되어 저장됩니다. 사람마다 유전자의 서열에 미세한 차이가 존재해서 이런 차이를 분석하면 개인의 고유한 생물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자표지 기술을 활용하면 식물도 사람처럼 고유한 생물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 부모를 확인하는 것처럼 분자표지를 통해 식물도 부모를 찾을 수 있다. 즉 이제 막 자란 어린잎 한 장으로 앞으로 채소가 어떤 형태로 자라게 될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찰에 등록된 유전자 데이터베이스가 많을수록 실종아동이 가족을 찾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처럼, 더 많은 분자표지, 더 정밀한 분자표지를 개발한다면 여러 품목의 육종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종자기업에서 육종 집단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농약과 비료, 농자재 그리고 인건비와 같은 여러 비용이 발생합니다. 대량 분자표지 기술을 이용하면 비실용품종의 우수한 특성만을 실용품종에 옮기는 여교배 과정에서 세대를 단축할 수 있습니다. 여교배를 통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려면 보통 6~8세대 정도 소요되는데, 분자표지 세트를 활용하면 3~4세대로 약 절반 정도로 기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이은수 농업연구사는 민간 종자기업과 협업하여 절간 길이가 짧아서 노동력을 줄일 수 있는 단호박 품종 육성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분자표지 기술을 활용하여 우수 개체를 조기에 선발하고 있는데, 빠르면 2년 후 품종을 육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농업기술진흥원 종자산업진흥센터에서는 분자표지 기술을 이전받아 종자기업 육종가 등을 대상으로 분자표지 검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분자표지 검정 데이터를 통해 F1(잡종세대) 판매 종자에서 다른 종자의 혼입은 발생하지 않았는지, 혹은 품종 간 구별이 가능한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한국농업기술원에서 개발한 ‘디지털육종정보시스템’을 활용해서 유전체 내 분자표지 위치와 유전적으로 멀고 가까운 정도 등을 자동으로 계산하고 시각화하여 육종가들이 더 쉽게 결과를 분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가 관행 육종에서 디지털 육종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점에 맞춰 현장에 도움이 되는 기술 개발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종자기업 육종가가 원하는 수요를 파악하고 그것에 맞는 기술을 개발하여 한국농업기술진흥원과 협업해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고 결과를 다시 피드백 받아 연구 기획에 반영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제57회 과학의 날 기념 과학기술진흥유공 과학기술부 장관표창’을 포함해 각종 대외포상이라는 성과로 돌아왔다. 분자표지 세트 기술이 육종현장에 이바지한 바를 인정받았다는 기쁨과 앞으로 더 열심히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2024년과 2025년에 개발한 채소 대량 분자표지 세트를 소개하기 위해 기술설명회와 실제 육종에서 활용하는 방법을 나누는 워크숍을 개최했습니다. 또 2024년에는 분자표지 세트를 활용하여 여교배 육종을 하는 실무방법에 관한 자료도 발간했습니다. 이때 육종가분들의 관심도가 대단히 높았어요. 그분들의 열정을 보고 긍정적인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분자표지 기술은 알지만 어떻게 육종에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법을 정리한 자료는 아직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은수 농업연구사는 육종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만한 품종개발 시 분자표지 기술 활용법과 사례를 정리한 자료를 2027년까지 발간할 계획이다.
그에게 연구 여정을 한 권의 책으로 담는다면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묻자, 그는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말했다.
“육종가의 손에 쥐어진 지도.”
그의 연구는 결국 품종 개발을 수행하는 육종 연구자들을 위한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목표로 하는 품종을 더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분자표지 기술과 조기 선발 방법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것. 그것이 그가 그리고 있는 지도다.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국내 종자시장 역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그는 그 해답을 해외 시장 맞춤형 품종 개발에서 찾고 있다.
“해외 현지에서 필요로 하는 특성을 가진 품종을 개발해 수출한다면 국내 종자시장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그는 병 저항성, 기능성 등 다양한 우수 형질을 조기에 선발할 수 있는 분자표지를 개발해 국내 종자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한다.
“공공 연구기관 연구자로서 우리나라 종자기업에서 신품종 개발이 더 활발해지고, 세계적인 종자기업이 탄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연구를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