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026 Vol.248

April 2026 Vol.248

그린 Culture > 고서 탐구

고영 ㆍ 도움 이종남 고령지농업연구소 농업연구관

작가 약력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새봄에는 새봄대로 늦봄에는 늦봄대로

꽃샘추위가 남았다지만 어디 새봄의 맹렬한 기운을 꽃샘추위가 이길쏘냐. 다가오는 봄은 거역할 수가 없다. 산과 들과 채소밭에 번진 새순과 봄나물은 새봄의 맹렬한 기운을 그야말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정학유(丁學游, 1786~1855)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정월령과 2월령에서 봄나물의 정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움파와 미나리를/ 무움에 곁들이면/ 보기에 신신(新新)1)하기/ 오신채(五辛菜) 부러하랴?”
“산채는 일렀으나/ 들나물 캐어 먹세/ 고들빼기 씀바귀며/ 소루쟁이 물쑥이라/달래김치 냉이국은/ 비위를 깨치나니”

정학유와 동시대를 살았던 김형수(金逈洙)에게도 봄은 봄나물과 함께 왔다. 그가 쓴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의 정월과 2월은 이렇다.

“무움·움파·미나리섞박지(菁筍筍蔥雜芹葅)/ 그 신선함은 오신채 못잖네(嘗新不必羨五辛)”

“산나물 아직 이른 때지만(此時山菜雖是早)/ 들녘의 나물은 먹을 수 있지(猶有埜蔌亦可茹)/ 물쑥·소루쟁이·씀바귀·냉이(蔞蒿羊蹄曲麻薺)/개운하게 비위를 돕네(恬淡俱醒脾胃歟)”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밥상에서 봄은 곧 봄나물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렇다. 예전에도 그랬다.

오신채도 지나칠 수 없다. 오신채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내용, 구성이 조금씩 다르다. 대개 파·마늘·달래·무릇·부추 등 자극성 있는 다섯 가지 푸성귀를 일컫는다. 유득공(柳得恭, 1749~1807년)의 『경도잡지(京都雜志)』와 홍석모(洪錫謨, 1781~1857년)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당시에는 입춘에 경기도 고을에서 움파·산갓·승검초·미나리움·무움의 오신채를 임금에게 진상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산갓은 이른 봄 눈이 녹을 무렵 산속에서” 나는데, ”더운 물에 데쳐 초장에 무치면 맵기가 이를 데 없으니 고기를 먹어가며 먹어야” 좋단다. “승검초는 움에서 키운 당귀의 새순으로 은비녀처럼 깨끗”하고 “꿀을 발라 먹으면 정말 맛있다”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오신채가 성욕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식용을 금지한다. 성욕이란 한 면으로는 생명력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독특한 향과 적절한 자극성이 있는 새봄의 순과 나물은 사람의 활력을 북돋지 않겠는가. 그 맛에 우리는 봄나물을 찾아 먹는다. 다시 『농가월령가』에 따르면 음력 2월에 이어 음력 3월의 채소밭은 호박·박·동아· 무·배추·아욱·상추·고추·파·마늘을 심느라 바빴다. 그 가운데서도 오이는 “농가의 여름반찬 / 이 밖에 또 있는가?”라고 읊을 만큼 중요했다. 그러고도 봄나물이 남아 있다. 삽주·두릅·고사리·고비·도라지·으아리만큼은 봄의 절정이 되도록 열심히 캐고 뜯고 따고 갈무리해야 했다.




봄나물의 변신 달래의 변신

봄나물은 갖가지 조리 방식에 따라 갖가지 음식으로 변신한다. 그 가운데 달래는 정학유가 노래했듯 봄철의 김칫거리이기도 했다. 그냥 무생채와 함께, 무생채 무치듯 무치는 것으로 뚝딱 김치가 된다. 무와 함께 담그는 달래물김치의 신신함도 쉬이 해먹는 달래무침의 신신함도 그야말로 일품이다. 된장찌개에 어울린 달래는 어떤가. 달래야말로 봄이고 또 봄 미각이다. 이런 일상생활은 굳이 쓰고 말고 할 게 없기에 문자 기록이 별로 없다. 그러다 달래는 근대 조리서 속에서 ‘달래장아찌’로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방신영(方信榮, 1890∼1977)의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1934년판)의 ‘달래장아찌’는 이렇다. 달래 한 보시기, 간장 조금, 기름 한 숟가락, 설탕 반 숟가락, 깨소금 반 숟가락, 고추 한 개를 가지고 아래처럼 만든다.

“달래를 뿌리를 따고 정하게 씻은 후 번철에 기름을 부은 후 달래를 볶다가 간장과 설탕과 깨소금과 고춧가루를 넣고 잘 섞어서 먹느니라.”

조자호(趙慈鎬, 1912~1976)의 『조선요리법(朝鮮料理法)』 속 ‘달래장아찌’는 달래 한 대접, 미나리 조금, 움파 잎 달린 채 한 개, 깨소금 한 숟가락 반, 참기름 7홉 종지, 설탕 적당량, 진간장이나 묽은 간장 조금, 고춧가루 약간, 소금 약간으로 만든다. 아래와 같다.

“달래를 대가리를 칼자루로 두어 번 두드려 깨쳐서 소금에 잠깐 절였다가 걸다란 물이 다 없어지도록2) 정한 물에 빨아서 물기를 없이해 가지고 움파는 잎을 곱게 채치고 미나리도 줄거리만 짤막하게 썰어서 전부 한데 섞어 갖은 양념을 해서 꼭꼭 눌러 놓았다가 잡수십시오.”

앞의 달래장아찌는 실은 달래나물이고, 뒤의 달래장아찌는 오늘날의 달래간장이겠다. 두말할 나위 없는 일상의 나물, 식료품이 20세기를 지나면서 이렇게도 살짝 몸을 한 번 바꾸었다.




오랜 인연

그러고 보니 최세진(崔世珍, 1468~1542)이 쓴 어학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도 달래가 등장한다. 최세진은 마늘을 뜻하는 글자인 ‘蒜(산)’에다, 마늘은 또 다른 한자로는 ‘葫(호)’라고 쓴다고 했다. 이어 마늘과 구분해 쓰는 ‘小蒜(소산)은 달래’라고 부기했다. 또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속 단군 이야기의 산(蒜)을 소산(小蒜)으로 새기고, 이를 달래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이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늘 환웅에게 기도하되 변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時神遺霊艾一炷蒜二十枚曰)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긴 ‘산(蒜)’은 원래 마늘뿐만 아니라, 마늘처럼 알싸하고 아린 내를 피우는 달래, 파, 부추 따위를 두루 일컫는 글자였다. 재배종 마늘은 11세기 이후 한반도에 들어왔다. 『훈몽자회』에도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 마늘은 ‘호(葫)’ 또는 ‘대산(大蒜)’으로 써 ‘소산(小蒜)’으로 쓰는 달래와 구분했다. 여기서 비롯한 의문이자 문제 제기이다. 곧 고려 시대의 기록으로 남은 웅녀가 먹은 것은 쑥과 마늘이 아니라, 쑥과 달래라는 것이다.

『훈몽자회』 속의 ‘蒜(산)’ 항목.
이 면은 1914년 조선광문회가 영인해 펴낸 『훈몽자회』의 한 면이다.
『훈몽자회』는 3,360자의 한자를 33갈래로 모으고, 훈민정음으로 그 음과 뜻을 달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01 ‘아주 신선하다’는 뜻이다.
02 ‘절이면서 나온 물이 다 없어지도록’이라는 뜻이다.



Vol.248
2026년 0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