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026 Vol.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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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Culture > 고서 탐구

고영 ㆍ 감수 채소기초기반과 이옥진 농업연구사

작가 약력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했다.
고전문학 작품 번역과 해제 및 음식문헌 읽기와 정리에도 힘쓰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기명 칼럼 「고영의 문헌 속 밥상」을 연재하고 있다.



“이 특이한 종자는 서역에서 출현해(異種出西域)/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나(何年入我東)/ 풀빛 껍질은 하늘빛에 가깝고(綠衣天色近)/ 둥근 몸통은 부처의 머리와 똑같네(圓體佛頭同)/ 껍질 벗기면 옥구슬처럼 흰빛 나고(削外瓊瑤白)/ 반으로 가르면 호박처럼 붉은 빛이라(刳中琥珀紅)/ 삼키면 달기가 꿀과 같고(呑來甘似蜜)/ 얼마든지 답답한 가슴을 씻을 수 있네(嬴得滌煩胸)”

조선 사람 이응희(李應禧, 1579~1651)는 수박을 이렇게 읊었다.1) 동아시아 사람들은 한여름 무더위를 날리는 이 고마운 작물의 고향을 서역(西域)으로 여겼다. 서역이란 중국 대륙 서쪽의 여러 나라, 여러 문화권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중앙아시아·서부 아시아·인도가 다 서역이었고, 좁게는 중앙아시아의 타림분지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수박의 생김새를 불상의 머리에 비유한 표현에도 다 까닭이 있다고 할 만하다. 타림분지는 아득한 예부터 지구의 동서를 잇는 길목이었다. 이곳은 중국 문화·인도 문화·초원의 유목민 문화·고대 그리스 및 페르시아 문화의 교차로였다. 예컨대 불경을 구하는 길의 모험담인 『서유기』의 역사적, 공간적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불교는 한마디로 서역을 통해 중국으로 한반도로 일본 열도로 전해졌다. 수박 또한 서역을 통해 중국으로, 또 한반도로 전해졌다.2)




수박의 북상 수박의 동진

수박은 제비꽃목 박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다. 학명은 ‘Citrullus lanatus (Thunb.)Matsum. & Nakai’이다. 수박은 박과의 오이·수세미·참외·멜론·박 등과 한 부류이다. 수박을 처음 접한 한자 문화권의 사람들도 이 점을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수박에 일찍이 ‘서과(西瓜, 서역에서 온 오이 같은 채소)’, ‘서과(西苽)’, ‘수과(水瓜, 물 많은 채소)’, ‘한과(寒瓜, 속살이 차가운 채소)’ 등의 이름이 붙었다. 또는 한국어 수박이란 ‘물 많은 박’ 아닌가. 수박의 조선식 한자어는 ‘수호(水瓠)’이다. 옛 문헌에서 수박을 찾아보려면 이 어휘를 모두 알아야 한다.

아무려나 수박의 원산지, 기원지는 어디일까? 오늘날에는 남아프리카 중앙부 칼라하리 사막과 주변의 사바나 지대로 추정한다.3) 남아프리카의 수박은 어느새 오늘날의 이집트, 리비아가 자리한 지역으로 북상했고, 지중해를 통해 더욱 멀리로 퍼졌다. 그러다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나 타림분지의 교역망과 접속하더니만 중국으로 또 한반도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력이 이러다 보니 옛 한자 문화권 사람들은 수박의 고향을 서역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농서에 등장하다

이러나저러나 수박은 한여름에 그 과육의 즙이 보물이었다. 고려의 대학자 이색(李穡, 1328~1396)도 수박을 씹으며 “수박이 흰 눈인 듯 차가워 이가 시리니(西瓜如雪齒牙寒)/열기가 내 뱃속에 침입할 수 없어라(熱氣無從入我肝).”4) 하며 즐거워했다. 조선 정조는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박은 근년에 회흘에서 들어왔으나 사람도 귀신도 모두 그 즙액을 마신다(西瓜近自回紇, 而人神共享厥液5)).”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고농서 속의 수박이라면 15세기의 『산가요록(山家要錄)』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책에서도 수박[西瓜]은 당연히 표제어로 잡혀 있다. 수박 재배법은 참외 재배법과 같다.6) 그러면서 한 그루에 열매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덩굴과 꽃을 모두 잘라내 수박을 3말들이 고리만 하게 키우는 방법을 소개했다. 열매를 보다 크게 키우고자 한 노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저장 및 조리법도 재미나다. 이 책은 송이·동아·마늘·청태(푸른콩)·복숭아·살구·고사리를 소금 또는 소금물로 담그는 방법을 싣고, 수박 담그기 또한 된다고 했다. ‘침서과(沈西果)’를 표제어로 한 그 내용은 간단하다.

“수박을 통으로 깨끗이 씻어 여느 채소 담그기 방법처럼 한다. 봄이 되면 소금기를 빼고 먹는다(西瓜全體淨洗, 如沈菜之例. 至春退鹽用之).”

수박을 소금 또는 소금물에 절여, 일종의 수박지를 담근 셈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끝물 수박은 그것대로 알뜰히 간추려, 한 해를 넘겨 새봄까지도 먹었던 것일까.

『산림경제』, ‘치포’의 ‘서과’ 항목. 수박을 ‘슈박’으로 쓰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한반도의 농법과 팔도의 수박

그러고 보니 동시대 그 누구보다도 미식가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허균(許筠, 1569~1618)의 한마디도 살펴볼 만하다. 허균은 수박이 고려 말에 원나라에서 들어와 개성에 처음 심어진 것으로 여겼다. 그러고는 “충주에서 나는 것이 상품인데 모양이 동아처럼 생긴 것이 좋다. 원주 것이 그 다음이다(忠州爲上. 形如冬瓜者爲佳, 而原州次之).”7)라고 했다. 상품성, 산지에 대한 인식이 조선 시대에 이미 이만했다.

다시 농법으로 돌아가자.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은 『산림경제(山林經濟)』의 ‘치포(治圃)’에서 “수박은 모래땅에 심어야 한다(西苽宜沙地).”고 한 뒤, 한반도 수박 파종의 적기를 입하(立夏, 양력 5월 5일경) 사나흘 전으로 기록했다. 이어 원나라 이래의 농업서의 내용을 인용해 “쓸데없는 꽃을 따주면 덩이가 크다(掐去餘花則苽肥大).”라고 했다. 덩치 키우는 농법을 싣고자 한 마음은 『산가요록』과 통한다고 하겠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 또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만학지(晩學志)’ 속 ‘수박(西瓜)’ 항목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수박 농법과 한반도의 농법을 아울러 상세한 기록을 남겼으되 모래땅이 수박밭 일구기에 좋다는 인식은 한결같다. 동시대 농민들이 입하 사나흘 전에 수박을 심는다는 기록도 한결같다. 그런 가운데 경기도 광주산을 최고로 쳤다. 서유구는 왜 광주 수박을 콕 집어 언급했을까? “땅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심고 가꾸는 방법이 제대로이기 때문(非土地之異也, 蒔藝得其方也)”이었다.

여기 이르러 오늘날 한반도 구석구석의 수박밭이 다시 보인다. 부여, 논산, 음성, 진천, 창원, 합천, 함안, 무등산, 고창… 글쓴이가 바로 떠올리지 못한 데도 있을 텐데, 어디서나 내 땅에 맞는 내 농업 기술로 수박 한 덩이를, 제대로 심고 가꾸겠다고 온갖 애를 쓰고 있다. 수박은 국제적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과채라는 점도 새삼스럽다. 그 물기, 수분량 때문에 내 땅에서 내, 내 땅에서 먹어치워야 한다. 한여름 한국인 입 속의 상쾌함, 뱃속의 시원함이 이렇게 유서 깊은 작물에, 거기 깃든 고심과 노고에 달려 있다.






01 『옥담시집(玉潭詩集)』, ‘옥담사집(玉潭私集)’의 ‘만물편(萬物篇)’, ‘소채류(蔬菜類)’ 참조. 인용한 시의 원제는 ‘서과(西瓜)’다.
02 오늘날 중국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속한 타림분지는 톈산산맥·쿤룬산맥·파미르고원에 둘러싸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03 농촌진흥청 농업기술포털 ‘농사로’의 ‘수박’ 항목
04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牧隱詩藁)’ 24권 참조. 인용한 시의 원제는 ‘서과(西苽)’다.
05 회흘은 위구르, 곧 서역이다. 여기서 ‘근자’는 상고할 만한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귀신’ 운운은 수박이 제수로 쓰이고 있음을 가리킨 것이다.
06 『그린매거진』 2026년 5월호(제249호), ‘고농서 속의 작물 밥상’, 참외 편 참조
07 허균, 『도문대작(屠文大嚼)』



Vol.250
2026년 06월호